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제국 근위대 (문단 편집) == 개요 == ||[youtube(i_Q_QEts7bY)] ||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행진곡. [[La Victoire est à Nous]](이제 곧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의 [[근위대]]이자 [[대육군|그랑다르메(대육군)]]의 최정예부대, 그리고 '''프랑스 제국의 인간병기.'''[* 당시 이들의 위상을 현재에 대입하면,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 정도와 비슷하다.] 나폴레옹의 전략 예비대, 비장의 카드였다. 이들의 행진곡이 들리면 다른 나라의 군대들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났을 정도.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나폴레옹이 본인과 기타 프랑스 제국 수뇌진의 신변을 보호하고,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육군]] 장병들을 차출해 구성한 [[엘리트|정예부대]]였다. 문자 그대로 소수([[보병]] 3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보병 근위대는 척탄 근위 연대, 콜드스트림 근위 연대, 스코틀랜드 근위 연대까지 총 3개 연대였고, 아일랜드 근위 연대와 웨일스 근위 연대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1910년과 1915년에 창설된다.] [[기병]] 2개 연대)였던 [[영국군 근위대]]와 달리, 제국 근위대는 단순한 [[육군]] 내 정예부대가 아니라 자체적인 [[포병]]까지 갖추어 [[무장친위대|거의 독자적인 군대 수준의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숫자 자체도 [[나폴레옹 전쟁]] 중후반기에 가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거의 70개에 달하는 [[연대(군대)|연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늘어난 부대는 대부분이 징집병으로 구성된 청년 근위대였고 나폴레옹 전쟁 초~중반기의 주요 전투에서 활약한 고참 근위대(Vieille Garde)는 그 수가 매우 적다.[* 이 영향으로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는 프랑스 제국이 가장 많고, 가장 강력한 엘리트 유닛을 보유한 세력으로 군림한다. 다양하기만 한 게 아니라 스펙 또한 압도적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1개 풀스텍 근위군단, 그것도 선임&청년근위대 총 12부대 + 기마척탄병연대 4부대, 아틸리에 아 슈발 2부대 + 콘벤시옹 포병대의 조합으로 된 부대는 어지간한 타 정규 군단 2개를 손쉽게 제압할 정도의 괴력을 자랑한다.] 나폴레옹은 이들을 보수나 보급과 같은 부분에서 특별히 대우했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아꼈다. 문제는 이들을 너무 아껴서 항상 예비대로 빼두고, 어지간히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쉽게 투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쉽게 이길 싸움을 어렵게 이긴다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단 근위대가 투입되기만 하면 결과는 확실했다. 가령 [[아일라우 전투]]의 경우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주력부대가 괴멸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기마척탄병부대의 돌격과 그에 이은 척탄근위대의 적절한 투입으로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반면 [[워털루 전투]]에서는 [[미셸 네]]가 기병의 우발적인 돌격으로 영국 육군 포병대를 잠시 무력화시킨 틈을 타 보병지원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근위대 보병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면박만 주고 보내지 않아 결국 포대를 다시 내주고 말았다.[* 다만 이는 나폴레옹이 단순히 근위대를 아꼈다기 보단 기병대를 말아먹은 네 원수가 저지른 패착이 워낙 심해서 나폴레옹이 근위대 투입의 효과를 비관적으로 보았던 것이 더 큰 요인이었다.] 허나, 나폴레옹이 근위대 투입을 쉽사리 하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근위대를 아낀 이유도 있었지만 그들은 항상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야 할 최정예 예비대였기 때문이다. 굳이 근위대가 필요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자원들을 소모하여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데 자신의 목숨과도 관련있는 근위대를 소모하는 짓은 나폴레옹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하지 않을 짓인만큼 전략적인 이유도 다분히 있었다. 다만, 이들의 명성이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워털루에서 근위대가 전진하다 다시 후퇴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프랑스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이것은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게 만든 큰 원인 중 하나였다.[* 워털루 전투 막바지에 지칠 대로 지친 영국군도 척탄병 근위대 2개 연대를 막기 위해 중앙의 병력을 한 곳에 모아 이들에게 집중 사격했다. 그 괴물같은 인식 그대로 근위연대 병력 3할이 날아갔음에도 전진하자 영국군도 결의를 다지고 총검을 맞댔다. 만약 여기서 영국군의 사기가 무너지거나 백병전에서 버티지 못했다면 블뤼허가 왔어도 졌을 것이라 사료된다.] 말하자면 수는 적지만 제값은 확실히 하는 장병들이었다. 다만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프랑스 근위대의 규모는 타국에 비하면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원래 지상군 규모가 대놓고 소수정예를 표방하는 [[영국]]은 물론이요, [[대육군|프랑스 대육군]]이 국민군의 속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정예부대인 근위대를 나폴레옹의 프랑스처럼 다양하고, 거대하게 유지한 경우는 유례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